비 내리는 날

그날도 가는 장마비가 쉼 없이 내리고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비 내리는
날이면 언제나 마루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난 책보를
풀어 방에 던져놓고 아버지의 자리에 앉아 싸리 울타리 아래 곱게
핀 꽃송이들을 바라보았다. 우리집 주위는 온통 다알리아 천국이었다.
'향기도 없고 그 큰 덩치만큼이나 흉하게 시드는 다알리아를
아버지는 왜 그렇게 좋아하실까?' 하지만 어린 내 생각으론 그저 아버지
겉모습만 흉내내고 있을 뿐이었다. 시든 꽃대 위에 무서리가 하얗게
내린 이른 새벽, 아버지는 가셨다. 한참을 더 사실 나이이건만 스스로
생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은 나는 불현듯 아버지 생각에 베란다에
다알리아를 심었고, 꽃이 피자 여가만 나면 방 한가운데에 앉아
그 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40대 중반을 넘도록 아버지의 마음은
그대로 안개 속이었다. 그러다 며칠 전 태풍 끝의 잔비가 내리던 날, 현관으로
들어서다 방 한가운데 앉아 계신 아버지를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거기엔 아버지와 많이도 닮은 아들 녀석이 앉아
곱게 핀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동운동을 하던 아버지는 가족의 안녕보다 구금된 동료들의 뒷바라지에
더욱 헌신적이셨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대가로 가난과 몰락을 스스로
받아들이셨다. 아내와 자식의 고통을 잊기 위해 비의 무게에 고개 숙이고 있는
측은한 다알리아를 보며 마음을 삭이신 아버지. 사택에서 쫓겨나 세간을
버스에 싣고 떠나올 때도 눈물 한번 비치지 않던 아버지. 말씀 한마디 남김없이
모두가 곤히 잠든 이른 새벽에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신 아버지.
아버지가 앉아 계셔야 할 그 자리엔 아들 녀석이 앉아 있고,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 나는 새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정이식 님 / 경남 진주시 하대1동